인사동 공예품 매장이나 백화점 전통 코너를 지나다 보면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물건이 있습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은하수가 내린 듯, 각도에 따라 영롱한 전복 껍질 빛을 뿜어내는 '나전칠기 보석함'입니다. 하지만 화려한 외관에 이끌려 다가갔다가 이내 가격표를 보고 흠칫 놀라 발길을 돌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보석함 하나가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을 호가하니, 초보자 입장에서는 "플라스틱이나 유리로 만든 것과 뭐가 다르길래 이렇게 비쌀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당연합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단순히 '귀한 조개껍질을 붙여서 비싸겠지'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연히 무형문화재 장인의 공방을 방문해 나전칠기가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뒤, 그 가격이 오히려 저렴하게 느껴지는 기묘한 경험을 했습니다. 나전칠기 보석함이 고가일 수밖에 없는 진짜 이유와 그 속에 숨겨진 옻칠과 자개의 과학적 가치를 소개해 드립니다.
1. 뼈대를 다듬고 칠을 올리는 '목칠' 과정의 인내
나전칠기는 이름 그대로 '나전(조개껍질을 가공한 자개)'과 '칠기(옻나무에서 채취한 천연 옻칠)'가 결합한 공예입니다. 많은 분이 화려한 자개 문양에만 주목하지만, 나전칠기의 진짜 가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닥 작업과 기초 공정에서 결정됩니다.
보석함의 형태를 잡는 나무 뼈대(백골)를 짜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아파트 환경에서 나무가 뒤틀리거나 갈라지지 않도록 수년간 건조한 좋은 목재를 정밀하게 짜 맞춥니다. 그 위에 천연 옻칠을 하고, 거친 삼베나 모시 천을 접착제 역할을 하는 찹쌀풀과 옻칠을 섞어 뼈대에 팽팽하게 입히는 '토회칠' 과정을 거칩니다. 이 과정이 끝나면 다시 말리고, 곱게 갈아내고, 또다시 옻칠을 올리는 작업을 최소 4~5회에서 많게는 10회 이상 반복합니다.
천연 옻칠은 온도와 습도가 정확히 맞아야만 마르기 때문에, 칠을 한 번 올리고 말리는 데만 수일이 걸립니다. 자개를 붙이기도 전에 장인은 이미 수개월 동안 먼지 하나 없는 방에서 숨을 죽이며 기초를 다지는 셈입니다. 이 단단한 목칠 베이스가 있기 때문에 잘 만든 나전칠기는 수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고 원형을 유지합니다.
2. 0.1mm 자개 위에 펼쳐지는 장인의 칼끝 미학
기초 옻칠이 단단하게 굳으면 비로소 주인공인 '자개'가 등장합니다. 나전칠기에 쓰이는 자개는 주로 전복, 소라, 진주조개의 안쪽 껍질을 얇게 갈아 만든 것입니다. 장인들은 두께가 0.1mm 안팎에 불과한 이 부서지기 쉬운 자개를 칼과 실톱을 이용해 도안대로 잘라냅니다.
여기서 장인의 숙련도에 따라 기법이 나뉩니다. 자개를 실처럼 가늘게 쪼개어 기하학적인 문양을 촘촘하게 메워나가는 '끊음질' 기법과, 전복 껍질을 실톱으로 정교하게 오려내어 나비나 국화 등의 형태를 만드는 '줄음질' 기법이 대표적입니다.
제가 작업 과정을 지켜보며 가장 소름 돋았던 부분은, 돋보기를 쓰고 머리카락보다 조금 더 굵은 자개 선을 핀셋으로 하나하나 집어 옻칠 표면에 밀착시키는 순간이었습니다. 손이 조금만 떨려도 자개가 툭 부러져 나가기 때문에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기계로 찍어내는 인쇄물이나 플라스틱 모조품에서는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장인의 시간과 시력이 고스란히 갈려 들어간 칼끝의 미학인 것입니다.
3. 마감의 정수, 자개의 빛을 깨우는 '칠긁기'와 '광내기'
자개를 다 붙였다고 해서 끝이 아닙니다. 자개를 붙인 위에 다시 전체적으로 검은 옻칠을 두껍게 덮어버립니다. 그러면 귀하게 붙인 자개 문양이 까만 옻칠 속에 완전히 파묻혀 보이지 않게 되죠.
그다음 공정이 나전칠기의 하이라이트인 '칠긁기(환치)'입니다. 장인은 날카로운 칼이나 숯을 이용해 자개 위에 덮인 검은 옻칠을 조심스럽게 긁어내거나 갈아냅니다. 조금이라도 깊게 긁으면 0.1mm의 자개 층이 깎여나가고, 너무 살살 긁으면 자개의 빛이 흐려집니다.
마지막으로 부드러운 융에 고운 흙가루나 콩기름을 묻혀 표면을 수천 번 문지르는 '광내기'를 거치면, 까만 옻칠 속에서 마침내 영롱한 자개의 오색 빛깔이 기적처럼 피어오릅니다.
시중의 저가 인공 자개 보석함은 화학 수지(플라스틱) 위에 가짜 자개 필름을 붙여 스프레이 코팅을 한 것입니다. 이런 제품은 처음엔 번쩍거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표면이 누렇게 변하고 칠이 껍질처럼 벗겨집니다. 반면 장인의 손에서 태어난 천연 나전칠기는 세월이 흐를수록 옻칠이 맑아지면서 내부에 숨은 자개의 빛이 한층 더 깊고 투명하게 살아납니다. 나전칠기 보석함의 가격은 단순한 물건의 값이 아니라, 수백 번의 손길을 견뎌낸 장인의 인내와 시간에 대한 정당한 가치입니다.
핵심 요약
나전칠기 보석함은 자개를 붙이기 전, 삼베를 입히고 옻칠을 수없이 반복하여 단단한 기초를 만드는 목칠 공정에 오랜 시간이 소요됩니다.
두께 0.1mm 안팎의 전복 껍질(자개)을 실톱과 칼로 정교하게 오려내어 핀셋으로 붙이는 고도의 장인 정신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옻칠로 자개를 덮은 뒤 다시 정밀하게 갈아내고 광을 내는 후가공을 거치기 때문에, 세월이 흐를수록 빛이 맑아지는 반영구적인 소장 가치를 지닙니다.
다음 편 예고
다음 편에서는 가구의 구석구석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하며 아름다움을 더하는 전통 금속 공예를 다룹니다. '제12편: 가구에 숨은 멋, 전통 가구 장석(흰두리, 경첩)의 종류와 미학'을 통해 한옥 가구의 숨은 포인트를 읽는 안목을 넓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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